기타는 왜?24_덕후는 덕후를 알아본다

SERIES, 해외음악여행기 — By 더부룩 on 8월 11, 2010 at 12:06 오전

1.

크라이스트처치 이후의 약 10일은 뉴질랜드 남섬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내가 탄 여행 버스는 뉴질랜드 남섬의 해안을 따라 북쪽 해안을 한바퀴 돌았다.

전날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전혀 신경쓰지 못했는데, 한숨 돌리고 나니 버스를 타고 좌우로 펼쳐지는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피곤한데도 잠을 못자는 이유가 그것이다. 오른편으로는 사진으로만 보던 옥색의 해안가가 남회색 태평양을 둘러싸고 깔려있다. 바다라면 동해안(진청색) 서해안(황갈색) 남해안(진청색)밖에 못봤던 나는, 새삼 바다에는 정말로 다양한 색깔이 있음을 느꼈다. 옥색 바다라니. 그런 바다가 진짜 있었다. 저 다른 곳 어딘 가에는 초록색 바다도 백색 바다도 있을테니, 계속 세계를 누비고 다니면 언젠가는 모든 바다의 색을 다 볼 수 있겠지.

왼편으로는 누런 풀들이 산과 언덕을 뒤덮고 있고 듬성듬성 숲이 보인다. 구름이 누런 산맥에 그림자 자국을 남기며 바람과 함께 역동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톨킨이 그리고자 했던 중간세계, 딱 그 곳이다. 당장이라도 저 언덕 너머로 말 탄 로한의 기사들이 나타날 것 같은, 신비하면서도 전원적이고 야성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실은 한 천년 전만 해도 이 목초지와 민둥산은 모두 까마득한 숲이었다. 뉴질랜드로 이주한 인간들-마오리족-이 땅을 개간하면서 벌목이 진행되었고, 산불도 잦아지면서 뉴질랜드는 원래 삼림의 절반 이상을 잃고 현재와 같이 황량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그 과정 중에 많은 동물들이 멸종했고, 그 중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큰 새였던 모아Moa도 그 때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화석을 봤는데 대가리가 거의 농구공 만하다). 물론 로한의 벌판도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모아가 뛰어다니는 숲이 좀 더 보고싶다. 비가 내린지 얼마 안되어 드러난 맨 땅에서는 벌건 흙이 다 씻겨 나가고 있었다.

2.

그레이마우스는 사실 별게 없는 도시다. 여행을 하다 보면 교통 상의 이유로 하루 머물러야 되는 도시가 생기게 마련인데, 그레이마우스가 그랬다. 백패커에 도착해서 양조장 투어가 있다는 팜플렛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후 나절 내도록 기타나 치고 있었을 것이다. 겨우 20분 후에 시작한다는 양조장 투어를 서둘러 신청하고 양조장으로 가보니, 같이 버스를 타던 사람들이 한가득 몰려있다. 알고 보니 내가 자고 있을 동안 양조장 투어 신청을 받았다고 한다. 으읔ㅋ 버스 기사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ㅋ 혼자서라도 투어 신청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후회할 뻔 했다.

호주나 뉴질랜드에는 각 지방의 대표 맥주 이외에도 수많은 마이크로브류어리Microbrewery가 있어,  지역마다 색다른 맛의 맥주를 즐길 수 있다. 뉴질랜드 남섬 중심에는 몬티에스Montieth’s 맥주가 유명하며, 오늘 간 양조장도 이 곳이다. 한가득 몰려 있는 사람들은 역시나 맥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설비에는 관심이 없다. 설명하시는 분도 그걸 아는지 대충 설명하고 바로 몰려 나간다. 그렇다. 맥주가 만들어지는 것 보다는 맥주를 마시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시음시간이 되어 맥주로 목을 축이자 무겁던 입도 한결 쉽게 떨어진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벨기에에서 왔다는 커플에게 데우스dEUS의 라이브를 봤었다고 말하자 상당히 놀라는 눈치다. 으아니! 데우스를 아는 외국사람은 처음 봤어요. Mr.Late는 음악 참 다양하게 듣는 것 같군요(항상 내가 버스를 마지막으로 탔기 때문에 버스 내에서 내 별명은 Mr. Late가 되어 있었다). 참 좋은 음악 하는 친구들인데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올해 글래스톤베리를 간다는 옆의 영국 친구는 생긴 건 꼭 데이브 그롤을 닮았는데, 꽤나 과묵하다. 글래스톤베리라고? 나 정말 가고 싶었는데 표를 못 구했다고 말을 붙이자 사람 좋게 웃으면서, 나중에 취소표가 풀릴 것이라며 그 때 구하라고 했다. 그래, 그러면 글래스톤베리에서 봐요!

그와 헤어지기 전에

“아 잠깐만요!”

“왜요?”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뭔데요?”

음.. 으음.. 음.. “음… 당신 푸 파이터스의 데이브 그롤 닮은 것 같아요.”

아무 쓸데도 없는 이야기인데 술에 취하니 그런 이야기가 갑자기 너무나 하고 싶었다. 듣고 웃더니만 사실 자기도 그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한다. 역시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었다.

<영국-베네룩스-싱가포르-한국 맥주 모임. 누가 데이브 그롤인지 찾아보자>

3.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f에서 빙하 투어를 하고 내려온 날, 피곤해서 자러 가려는 순간 라디오에서 필 콜린스의 Another day in paradise가 나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좋아하는 곡이 나오니 마구 기타가 치고 싶어진다. 다음 날에도 일찍 일어나서 버스를 타야 했기 때문에 한참 고민하다 결국엔 기타를 꺼내왔다. 이미 시간은 늦어 남아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는 한 곡만 치기로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잊고 필 콜린스에 이어 라디오헤드를 치기 시작했다. 방해가 될까봐 Street Spirit을 작게 불렀다. 후렴구까지 흥얼거리고 기타를 내려놓으려는데 갑자기 거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돌아본다. 옆에서 체스를 치던 두 친구는 ‘아 친구, 잘 들었어~’하고 한마디씩 해주고, 뒤에서 컴퓨터를 하던 애는 박수를 쳐준다. 방해가 되도 모자를 판에 잘 들었다니 고맙기도 하고 또 흥도 나고 해서 바로 다른 곡을 치기 시작했다. Karma Police도 해보고 심지어는 연습하지도 않은 There there에 2+2=5 같은 곡 까지 더듬더듬거리고 있으려니, 뒤에서 컴퓨터를 하던 친구가 나에게 와서는

“헤이, 그 곡(there there)은 베,베이스 줄 튜닝을 바꿔주면 쉬워.”

라고 한마디 해주는 것이다. 이 곡을 좋아는 커녕 아는 사람도 잘 못 만나 봤는데, 감이 왔다. 떡밥을 던져봤다.

“아 그래? 내가 예전에 라이브 봤을 때는 정튜닝으로 하는 것 같던데.”

“뭐? 라, 라디오헤드 라이브를 봤어???”

“응, 작년에 아 아니 제작년에 벨기에에서 봤었어.”

“와 그럼 인 뤠인보우스 투어 때? 시발 그 기깔나는 L, LED 막대를 봤다는겨?”

“응, 아주 개쩔었지.”

물렸구나! 그렇게 우리는 미드나이트-컨버쎄이션을 시작했다. 역시나 덕후는 덕후를 알아본다. 사실 호주에서 왔다는 이 친구는 나만큼이나 라디오헤드를 좋아하는 빠돌이였고, 우리는 거기서부터 우리의 이야기-남들은 알아듣기 힘들 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비사이드 곡은 얼마나 들어봤는지(특히나 암네시악 비사이드가 나는 좋던데!), 톰 요크의 솔로 작업은 좋아하는지(아, 작년 래티튜드에서 톰 욬의 솔로 퍼포먼스가 있었는데 유투브로 봐봐. 혼자서 다 해), 너 혹시 그러면 톰 요크 솔로 앨범 리믹스도 들어봤는지, 그거 황금색 커버 음반 맞는지, 그 중에 특히 앤 잇 뤠인드 얼 나잇이 괜찮은 리믹스 아닌지, 그렇고 그런 종류의 덕력-넘치는 이야기를 한동안 한다. 질리도록 라디오헤드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또 다른 음악 이야기를 한다. 아, 그럼 너는 어떤 종류의 음악 듣냐?

“아, 나? 나? 나, 나는..”

원래도 말을 좀 더듬던 친군데 내 질문에 갑자기 더 심하게 더듬는다. 참다못한 나는 그 친구에게 노트와 펜을 건네주었고, 곧 그 친구는 흥분에 겨워 말을 더듬으면서 노트 한 장 가득 추천 음반을 적어주었다.

“너, 너는 프로그레시브를 잘 안듣는다구? 이 친구야, 프로,프로그레시브 음악이야 말로 진짜 시발 개쩌는fucking great 음, 음악이야. 뭐? 킹 크림슨도 안 들어봤어? 그거하고, 또…”

그렇게 나는 킹 크림슨King Crimson과 오페스Opeth를 추천받았고, 나는 그 친구에게 윌코를 추천해 주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이야기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2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아, 근데 너 그 악기는 뭐야? 어,엄청 특이하게 생겼네.”

“이거 기타야. 여행용 기타라서 작은데, 소리는 괜찮은 것 같아. 쳐볼래?”

그 친구가 기타를 치는 걸 보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은 멜번에 다른 통기타를 구해놨거든. 이건 좋긴 한데 나랑은 안맞는 것 같아. 나한테서 살래?”

이 친구 반색을 하더니 당장 가격 흥정을 하고 ATM으로 달려간다. 나도 따라갔다. 결국 우리는 새벽 3시에 빙하 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ATM 아래에서 기타 거래를 하고야 말았다.

“사줘서 고맙다. 사실, 너도 느끼겠지만 여행 중에 이렇게 음악 좋아하고 말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만나는게 쉽지 않은 것 같아. 너라면 기타를 믿고 팔 수 있을 것 같다(도대체 어떻게 내가 이런 긴 문장을 영어로 말할 수 있었는지, 지금으로썬 당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 어, 나, 나도 마찬가지야! 여행 중에 만난 애들은 병신같은sucking 레이디 가가밖에 안 듣더라구!”

<거래증명사진>

호주로 돌아가서, 그의 고향이 있는 퀸즐랜드 주로 가면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나는 자러 들어갔다. 새벽 4시 반이 넘었다. 에휴, 잠은 다 잤다.

BGM_’Another Day in Paradise’ by Phil Coll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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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개

  1. 깐도리 님의 말:

    ㅋㅋㅋㅋ 이번화가 개인적으로 제일 재밌네
    나도 이번 여행에서 저런 친구들 만날 수 있을까 ㅋㅋ

    • 더부룩 님의 말:

      아 음악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저는 이번 이야기는 쓸까 말까 고민했는데… 앞으로는 이런 이야기도 써야겠군요!

  2. 아다마 님의 말:

    아이고 진짜덕력넘치는대화네 나도 못알아듣는게 많을정도며뉴ㅠㅋㅋㅋㅋ

  3. 간지이로 님의 말: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고 덕후는 덕후를 알아보는건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스캐터에서는 로그스와 함께 얼굴 제일 많이 팔린게 부록이구나

  4. Arcady 님의 말:

    써킹 레이디가가!

  5. sleet97 님의 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증명사진이 잼나네요…ㅋㅋㅋ

  6. sleet97 님의 말:

    생각해보니 저두 예전에 출장갔다가
    음악 좋아하는 사람만나서 며칠동안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그 나라 음악 추천도 받고, 저두 우리나라 음악 추천도 해주고..ㅋㅋ

  7. 마탁 님의 말:

    우와 그런친구 만나는게 제일 부러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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