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 2016)

영화 전체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직접 연기한 캐릭터 혹은 본인의 특성을 투영한 캐릭터를 통해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에둘러 해오던 자비에 돌란은, ‘단지 세상의 끝’에서는 12년 만에 귀향하는 한 남자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시작한다. (…) 하지만, 연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서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자비에 돌란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직 흥미롭고, 전작 ‘마미’에서 이어지는 일종의 영화적 실험은 더욱 교묘하다. ‘단지 세상의 끝’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영화 속에 담겨있지 않은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
누군가는 자비에 돌란 특유의 스타일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감각적인 선곡과 과감한 표현에 열렬한 환호를 보낼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치기어린 자의식 과잉에 사로잡혔다며 차가운 야유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자비에 돌란의 여섯번째 장편 ‘단지 세상의 끝’에는 이제까지 그의 작품들을 특징짓던 인장이 고스란히 찍혀있다.

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독특한 가족관계가 중요한 화두가 되어왔고, 장-뤽 라가르스Jean-Luc Lagarce의 희곡을 각색해서 만든 이번 영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본인이 직접 연기한 캐릭터 혹은 본인의 특성을 투영한 캐릭터를 통해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에둘러 해오던 자비에 돌란은, ‘단지 세상의 끝’에서는 12년 만에 귀향하는 한 남자의 입을 빌려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치병에 걸린 루이(가스파르 울리엘Gaspard Ulliel)는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 집을 떠난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가족들을 찾아온다. 떠나있었던 시간만큼 그의 집은 낯설기만 하고, 자신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동생 쉬잔느(레아 세이두Léa Seydoux)와 처음 만나는 형수 카트린(마리옹 꼬띠아르Marion Cotillard)은 물론, 엄마(나탈리 베이Natalie Baye)와 형 앙투안(뱅상 카셀Vincent Cassel)과의 사이 역시 어색하기만 하다. 반나절 남짓의 시간 동안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들 속에서 명확한 것은 어떤 것도 없고 주어지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인물들의 감정이 켜켜이 쌓이면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더해지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실마리도 풀리지 않는다.

2.
그의 작품에 늘 함께 따라다니는 수식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이 영화에도 역시 치기와 과잉이 공존한다. 하지만, 연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서부터 이어져오고 있는 자비에 돌란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직 흥미롭고, 전작 ‘마미’에서 이어지는 일종의 영화적 실험은 더욱 교묘하다. ‘단지 세상의 끝’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영화 속에 담겨있지 않은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건 바로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얼마 전, 어딘가(quelque part, il y a quelque temps déjà)’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배경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불특정한 시공간을 던져놓는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이 영화에서 앞으로 묘사될 사건 모두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는 단편적인 정보 뿐이다. 즉, 이 영화 속 이야기는 현재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시간적으로 더 앞선 과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루이는 영화 속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영화 속에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처럼만 묘사되던 그의 죽음은, 사실 이 모든 이야기가 과거의 일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의 시작부를 다시 떠올리면 사뭇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원작 희곡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상당수 생략하는 과감함을 보였지만, 영화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독백만은 오롯이 남겨두었다. 그래서, 마치 허공을 헤집듯 불분명함으로 가득 찬 이 영화 속에서도 루이가 12년 만에 가족을 찾아온 목적은 (그의 목소리로) 영화 처음에 분명하게 제시된다. 루이는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비행기에서 짖궃은 장난을 치던 어린아이에 의해 루이의 눈은 가려진다. 그 직후 루이가 내린 공항에서는 모든 게 뿌옇게 아웃포커스되어 형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탄 루이는, 눈을 전부 가리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애초에 눈이 가려진 채 시작된 이야기였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루이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그의 얼굴은 교묘한 명암에 의해 절반 이상이 어둑하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묘사된다. 루이는 영화가 시작되던 순간에는 자신의 목적도 의도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눈이 가려진 뒤로 그는 자신이 꺼내려 했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에 의해 눈이 가려진 직후에 루이의 독백은 일단락 되었다.) 그렇게, ‘단지 세상의 끝’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말이 나오지 않는 답답함 만이 남게 되었다.

3.
연극 상연용으로 쓰여진 희곡을 영화 각본으로 각색한 만큼, 이 영화에는 연극적인 장르적 특성이 곳곳에 드러나있다. 극중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은 (플래쉬백 혹은 일부 장면들을 제외하면) 모두 좁은 집 안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이야기의 변곡점이 되는 특정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의 모든 장면들에는 루이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세가지 종류의 장면으로만 반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루이가 홀로 등장하는 장면, 5명의 가족이 모두 등장하는 장면, 그리고 루이와 또다른 누군가가 등장하는 1:1 대화 장면이다. 이러한 연극적인 특성과 마치 파장을 그리듯 반복되는 구조는 이 영화에서 일종의 규칙처럼 지켜진다. 헌데 루이와 앙투안이 자동차로 극의 공간을 옮기고, 루이를 배제한 채 앙투안과 쉬잔느만 등장하는 대화 장면이 등장하기 시작하자 앞서 말했던 규칙을 아슬아슬하게 지켜오던 이 영화는 그 중심을 잃는다. 그러자 파장은 깨어지고 균열이 발생한다. 이건 누군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던 한 가족의 파국이었다.

사실 루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루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 할 때마다 그의 입가를 떠나려던 말은 다른 누군가의 말에 가로막혀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를 잃는다. 루이가 어렵게 말을 꺼내면 그의 입가를 떠난 말은 가닿을 곳을 잃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전혀 다른 화제거리로 변해버린다. 그들은 루이를 사랑한다고, 혹은 동경한다고 말하지만 루이의 삶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영화에서 루이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대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고, 그들의 표정은 마치 단단한 방패와도 같다. 모두가 루이에게 이야기하라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수많은 대화들이 오가는 이 영화에서, 정작 제일 중요할 것처럼 부각되었던 루이의 (다가올) 죽음은 단 한번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해보였던 것들은 내내 속에서만 응어리진다. 그러나, (자비에 돌란의 다른 영화가 으레 그러했듯) 인물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사랑과 증오 사이 그 어딘가의 미묘한 감정은 잔존한다. 그리고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채 숨겨져 있는 사실들을 파고들어갈 필요가 있다.

4.
단지 세상의 끝’에서 수면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심장한 진실은 영화의 몇몇 장면과 대화를 돌아보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영화 속에는 두가지 종류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첫번째는 관객들에게는 전달되었지만 가족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그건 바로 루이의 불치병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두번째는 관객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가족들 중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건 바로 12년 전에 있었던, 루이가 집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된 갈등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 두가지 ‘말하지 않은 것’들의 상세한 전말은 절대 명확히 제시되지 않지만, 그 단서가 될만한 내용들은 극 속에 충분히 숨겨져있다.

여러 차례 등장하는 플래쉬백, 그리고 루이와 앙투안의 대화를 바탕으로 미루어볼 때, 12년 전에 루이가 집을 떠나게 된 사건은 아마도 루이의 성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사건일 것이고, 특히 앙투안과 깊게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앙투안의 이해하기 힘든 신경질과 과민반응은 당연히 이 사건으로부터 무관하지 않다. 앙투안은 루이와의 대화 그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루이가 옛날에 사랑했던 이의 죽음을 알려주고, 종국에는 가족들 모두 자신의 편은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며 울부짖는다. (카트린은 앙투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앙투안 대신 루이의 이름을 붙였다.) 그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루이에게, 사실 관심이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퉁명스레 쏘아붙인다. 앙투안은 (그것이 지겹게 들어온 일요일 이야기이든, 과거에 살던 집 이야기이든) 루이와 함께 살던 시절의 이야기를 극도로 꺼린다. 그리고 루이는 앙투안과의 과거를 회상하던 플래쉬백 장면 직후에 토악질을 했다. 루이와 앙투안은 그들이 겪은 일을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고, 그 사건의 여파는 서로를 마음 속에서 계속 괴롭히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카트린의 의미심장한 행동과 대사들은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한다. 카트린은 루이와 처음 인사할 때 입맞춤을 망설이고,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는 앙투안과 루이의 사이가 멀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한다. (그녀는 루이가 앙투안의 직업을 모른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할 뿐더러, 앙투안이 루이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녀가 우물거리며 넘겨버린 대사(‘시간이 얼마나 있냐(combien de temps)’)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단서를 종합해 볼 때, 카트린은 루이의 불치병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불치병이 무엇이었는지까지도. 그래서 루이는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 순간 카트린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 지긋이 가져다 댔다.

루이와 앙투안, 그리고 루이와 카트린 사이에서 포착되는 이 감정의 굴곡을 좇아가다 보면, (영화의 ‘규칙’이 깨어진 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파국은 사실 이 숨겨진 비밀들의 연장선상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루이는 마침내 무언가를 간신히 고백하지만, 그건 그가 내내 마음에 담고 있던 죽음의 전언이 아니었다. 루이는 자신의 불치병에 대해 고백하는 대신 앞으로도 가족들을 자주 만나고 싶다는 뻔한 인사치레의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루이가 앙투안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파리로 놀러오라는 말을 한 순간,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5.
과거의 루이와 앙투안에게 일어난 사건을 짐작하고, 루이의 불치병을 카트린이 알고 있다고 가정하면, 이 장면에서 앙투안과 카트린을 (그리고 그들이 식탁 아래로 맞잡은 손을) 카메라가 번갈아 비추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시점에서, 파리의 게이 구역에 살고 있다던 루이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는 사실은 엄마 말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가 이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그들에게 (불치병에 걸린) 루이의 말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한편 루이가 인사치레로 건넨 이 말이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역시 엄마 뿐이었다. 루이의 이 의견은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엄마가 루이에게 제안했던 것이었으니까. 말인즉슨, 이 장면에서 루이의 고백에 대한 모두의 반응을 합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에서 앙투안과 카트린, 엄마가 각각 간직하고 있는 진실의 조각들을 짜맞추어 볼 필요가 있다. 그러자 선명해지는 것은 과거를 감싸안지도,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던 이들의 뒤틀린 관계였다.

이 흥미로운 앎의 불일치 속에서 ‘단지 세상의 끝’의 의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알고 있음과 알지 못함을 병치하고,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을 뒤섞어버림으로써 의도적인 혼란 속으로 모두를 끌고 가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극중 모든 대화는 제멋대로의 흐름과 변칙적인 리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의 시공간은 불분명한 과거의 어딘가로 제시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의 눈은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었다.

6.
눈이 가려진 채 시작되었던 루이의 이야기는 결국 아무런 진전도 겪지 못한 채 파국을 맞이한다. 이 혼란 속에서 뚜렷이 살아남은 것은 불안과 초조로 점철된 그의 표정 뿐이었다. 첫 독백 장면에서 죽음을 뇌까리던 그는, 내뱉는 말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고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번들거리고, 그의 눈동자는 흔들린다. 죽음은 그에게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지만, 루이가 집을 다시 떠나간 후에만 가족들이 비로소 모든 걸 알 수 있는 위치에 놓여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비극이었다.

결국 이 영화의 방향은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명확해진다. 이 영화가 담아내고자 했던 것들은 영화 속에서 담겨진 적 없는 것들 속에 숨겨져 있었다. 루이와 가족들 사이의 과거가 그랬고, 가족을 떠난 루이의 12년 동안이 그랬고, 곧 다가올 루이의 죽음이 그랬다.

7.
단지 세상의 끝’에는 뻐꾸기 시계를 비추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삽입되어 있다. 영화에 총 4번 등장하는 뻐꾸기 시계가 나오기 직전마다, 흥미롭게도 루이는 누군가와의 대화 후에 홀로 남겨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마다, 루이를 아래에서 바라보는 카메라는 루이가 혼자 아침을 먹던 공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웃포커스된 상태였다.) 그리고 영화가 마무리될 때가 되어서야 시계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뻐꾸기는 밖으로 뛰쳐나온다. 하지만 그 뻐꾸기는 같은 곳을 맴돌 뿐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했다. 루이는 바닥에 떨어진 채 헐떡이는 작고 가여운 새를 뒤로 한 채, 망설임 없이 대문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의 눈은 푹 눌러쓴 모자에 의해 다시금 가려진다.

어디로든 날아가려 좁은 집 안에서 안간힘을 다해 날갯짓하는 뻐꾸기를 바라보며, 루이는 아마 12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을 것이다. 루이도, 뻐꾸기도 한때 보금자리를 떠나기 위해서 안팎으로 아우성친 적이 있었다. 이미 한번 이 집을 떠난 적이 있었던 루이는 문을 열고 나갔지만, 아직 한번도 이 집을 떠난 적이 없었던 뻐꾸기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사뭇 달라 보였던 그 둘 모두에게 곧 닥쳐올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죽음이었다.

 


단지 세상의 끝 (Juste la Fin du Monde, 2016)
dir. 자비에 돌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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